성경이 말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자유! 시간에서 자유, 돈에서 자유. 인간관계에서 자유. 건강에서 자유. 우리 모두의 바램이 이 ‘자유’라는 말에 담겨져 있다. 그 자유의 비결은 그 주님의 안에 ‘거함’에 있다.
거한다는 건 뭔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왔다. 여기가 거하는 곳인가? 목사인 제가 여러분을 방문한다. 그럼 여러분의 집에 내가 거하나요? 아침에 일터로 나간다. 거기가 거하는 곳인가? 그럼 거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내가 먹고 쉬고 자는 곳이다. 내 가족이 있는 곳, 맘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거하는 곳이다. 내가 예수 안에 거한다 함은 내가 예수와 함께 맘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주님과 어떻게 맘을 나눠? 그분의 맘을 알 때 나눈다. 사람들은 신앙을 거꾸로 안다. 내가 주님께 나아갈 만 해야 나갈 수 있다 한다. 실제로 내가 친구를 만날 때 친구를 만날 자격이 내게 있나 돌아보고 나가나? 그냥 나가지. 그 친구를 보고 나갈 뿐이다.
내가 누굴 만날 때 불편한 느낌을 갖는 만남이란, 만날 상대가 누군지 모를 때다. 편안하고 즐거운 만남, 연애할 때 그러죠. 제가 연애할 때 학교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주말에 만나 데이트했다. 월요일에 떠나보내고 토요일 만남이 기다려져. 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아니까. 나는 본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자책하고, 그 만남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는데 말이 안 된다. 만남이 기쁘냐, 불편하냐의 관건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만날 사람을 얼마나 아느냐에 있다.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내가 주님을 만날만한가 나를 반성하는 예배자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얼마나 아는가. 그 분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잘 만나는 거다.
여전히 난 부족해! 하는 건, 내가 만나는 그 주님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마치 높은 분을 만나러 갈 때처럼. 격식을 차리고 예의를 갖추고, 예약을 해야 한다. 그처럼 예배를 준비한다면 주님을 잘 모르는 거다.

오늘 그처럼 주님을 잘 모르는 여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 이 여자는 목이 말라, 그저 갈증이 나서, 물동이를 들고,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서, 얼굴 마주치기 싫어서. 동네 밖 우물가로 물을 길러나간 여인이다. 사람을 피해 동네 밖으로 나갔는데, 왠 남자를 만난다. 자기 동네사람도 아니고 저 멀리 유대 남자를 만난다. 얼마나 기분나뻐? 그 남자가 물을 달라하니, 독 쏜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야 너 아님 내가 물을 못 먹겠나?하고 쏟아낼 남자의 말에 대응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웬걸.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텐데. 하니. 좀 이상하다.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 다르다.
나도 그런 물. 영원히 길지 않아도 된다하니, 그런 물 좀 나도 주소. 사람들 피해 물 길러 올 시간도 피할 겸. 이러니 대뜸 그 남자 왈.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한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지가 물 준다 하니 그런 물 좀 달라했더니, 남편을 데려오라고? 내가 남편이 어딨냐? 남편하나 잘 만나 인생 펴보려 그렇게 애썼는데, 지금 있는 남자도 시원찮고...그러다가 여자가 깨닫는 거야. 야 그러고 보니 내가 참 남편을 못 만났구나! 그러고는 대답하지. 여보슈 내가 남편이 없소. 이렇게 예수님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점점 더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해져. 당신은 이 물을 준 야곱보다 크냐? 그러다가 예배의 문제까지 간다. 당신네는 예루살렘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드려야 한다하고. 예배를 언급한다.
왜 예배일까? 바쁘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왜 예배자로 이렇게 나와 있나? 어쩔 땐 알기 어려운 설교 오래하면 엉덩이도 지끈거리고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여자가 궁금해 하는 그 예배, 어디서 진짜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어디서 내 답답한 마음, 앞길이 캄캄한 내 인생을 뻥 뚫어줄 그 만남을 어디서 가질 수 있는가? 그 어디서 중에 하나인 이곳에 오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이 넌, 예배를 장소의 개념으로 묻니?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 아버지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는다고 말하신다. 즉 너희는 예배를 장소와 공간의 문제로 찾니? 우리는 어디로 가면, 어떻게 하면 내 가슴을 뻥 뚫어주고 캄캄한 내 인생의 문제를 속 시원히 풀어줄까?를 물었는데,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말씀하신다. 장소와 상관없다고 하신다. 물질적이지 않으시다. 본질적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지금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 털어내고 푼 시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 말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아버지 말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아버지로 만나는 사람. 일어버린 탕자의 아버지. 아들이 유산을 달라면 주는 아버지. 그 재산을 다 처분해 멀리 떠난다는데도 붙잡지도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굶어죽지 않으려고 아버지께 왔어도, 그 아들에게 대하여 한 번도 네가 가져간 돈 어쨌니?라고 묻지 않으시는 아버지.
우리는 자식이 나간다면 잡아야지 그래 내보내는 아버지가 어딨데? 하지만,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싫어요. 불편해요. 하면 아버지는 잡지 못한다. 만약 그 아들을 잡는 다면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자신을 위해 잡을 뿐이다. 자식이 집나간 아버지란 소릴 듣지 않으려고. 그러면 아들이 그렇겠죠. 이것 봐라! 우리아버지는 내가 생각한 그 아버지가 맞지. 저를 위해 아들을 이리 붙잡아놓는 아버지! 진정으로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잡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집을 나간순간부터 아들을 기다린다. 언제 돌아올까 동구 밖 낯선 그림자만 봐도 우리 아들일까 늘 돌아본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아버지다. 나 밖에 모르는 아버지. 당신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나를 좌지우지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내게 주시려는 아버지. 심지어 내가 아버지의 맘을 오해해서 내가 볼 때 선악과가 좋게 여기면 하나님도 막을 수가 없으신 분.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정말 알아드리는 사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참된 예배자로, 참된 사람으로 회복시켜주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
생각해보면 내 아들과 내 사랑하는 남편과 오늘 어떻게 지냈니?라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에 5분의 시간을 낸 적이 별로 없다. 왜 안 될까? 우리 영혼이 사람됨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이 지난주 말씀처럼 주님이 지으시는 성전이 될 때만이 된다. 인간 스스로는 안 된다. 요즘 아이티 뉴스를 보면 날마다 시체가 널브러진 그 비참한 현장이다. 그렇게 사람이 죽어져 나가는데 는 가슴 아파하면서도, 주님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날마다 아이티인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는 사람이 바로 죽어져 나가는 인생인데. 우리 주님 보시기에. 우린 눈에 안보여. 그 눈을 가진 하나님 아버지가 우릴 찾으신다. 우리를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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